QU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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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9. 14:17
작성자
QUISS

 

COMMISSION @ft0_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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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영국의 2월은 약간 쌀쌀하지만 언제나 영상의 기온이고, 평소보다 덜하다곤 해도 비는 종종 내린다. 오늘, 2월 14일. 연인들이 초콜릿을 주고받는다는 날치고는 제법 우중충한 하늘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안경 너머의 무뚝뚝한 눈이 두 번인가 깜빡였다. 캐스트는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키슈 레이먼, 영국의 사립탐정. 친우이자 연인.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름이 붙어있는 그는 우중충한 날씨와 대비되듯 유들한 얼굴로 느긋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라 이건가.”



키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캐스트의 어깨너머로 눈짓했다. 캐스트의 후측에는 카운터가 있을 터였다. 캐스트는 등받이 너머로 카운터를 힐끗 바라보았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종이가방을 든 남자가 카운터 직원으로부터 손바닥 두 개만 한 분홍색 상자를 건네받고 있었다. 겉에는 리본까지. 필시 발렌타인 데이 용도의 초콜릿일 터였다. 메뉴판을 보니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는 초콜릿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남자는 종이가방을 든 손으로 초콜릿 상자를 소중히 받아들더니, 우산을 펴며 출입문을 열고 나섰다. 곧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남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갈 때 모습을 얼핏 보니 남자라기보단 남학생에 가까워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저 남자는 어쩐지 고백하러 가는 길 같은 느낌인데...”

“그치? 살짝 보니 오직 저 초콜릿을 사러 이 카페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 종이가방도 선물이 들어있는 것 같았고.”

“짧은 순간에 별 결 다 봤네.”



관찰력은 탐정의 기본이지, 라며 키슈는 어깨를 으쓱였다. 곧 두 사람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탁자에 안착하는 찻잔.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그 사이로 창문을 넘어 길거리의 소음 따위가 살짝 들려왔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 누군가의 말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딱히 바쁜 용건 없이 그저 산책과 식사 정도를 목적으로 한 외출은 지극히 평온했다. 커피를 마시며 평소 같은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다가, 또 잠시간은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 속에서 빗소리를 들었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우중충하니 흐렸다.

비가 그친 흐린 하늘이 비치는 창문을 배경으로, 작은 모래시계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렸다. 거리는 한산했다. 캐스트는 조금 식어 김이 사라진 커피잔을 들었다. 어차피 한 모금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입술에 머그잔의 끝이 닿고 씁쓸하고 따뜻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키슈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슬슬 갈까, 캐스. 비도 한참 전에 그쳤으니.”



캐스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곤 천천히 일어났다. 긴 몸을 훌쩍 일으킨 키슈가 먼저 카운터로 가는 뒷모습이 그의 안경에 비쳤다. 카페의 문을 열자 비가 그친 뒤의 서늘한 공기가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어깨를 슬쩍 움츠리며 거리로 나섰다. 카페의 외벽에는 작은 천막 지붕이 있고 그 아래로는 탁자 한 개와 난로가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심했던 탓에 빗물이 난로까지 들이친 듯 보였다. 난로 위에 빗방울이 어쩐지 묘한 무늬를 그리며 흩뿌려진 것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난로 옆을 돌아 발걸음을 옮기자 발치에 무언가 치였다. 비에 젖은 폐지였다. 작은 박스 종이 몇 조각이었다.



“...영국은 날씨만 좋아져도 훨씬 살기 좋은 나라일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이런 기후라서 만들어진 문화도 있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만.”



누가 이런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하겠냐만은.

두 사람은 카페의 모퉁이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에 오기로 한 의뢰인이 있었기에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드러난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다. 평일 오후, 점심시간도 아닌 때에 시내 중심지도 아니라면 사람이 많은 쪽이 이상하긴 하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발을 옮기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멈칫했다. 손을 잡고 있었기에 나머지 한 명도 덜컹, 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먼저 멈춘 것은 키슈 쪽이었다. 캐스트는 뭐야, 라고 묻기 전에 키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색소가 옅은 말끔한 얼굴이 인도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길은 돌로 된 타일이 깔렸고, 가운데에 가로수가 일정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었는데 키슈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런 가로수 중 하나였다. 캐스트는 키슈가 무엇을 보고 있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뭐지, 저건.”

“글쎄. 색만 보면 초콜릿 같은데.”



아니, 그건 의심의 여지 없이 초콜릿이었다. 가로수가 숨겨진 흙바닥을 네모나게 감싸고 있는 회색의 돌. 그 아래 바닥. 그곳에 있는 것은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갈색 흔적이었다. 가장 크게 보인 것은 마치 물웅덩이 같은 모습으로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왜인지 가운데가 약간 불룩했고, 딱딱하게 굳어 초콜릿 특유의 부드러운 윤기를 내고 있었다. 미소 짓고 시험 삼아 발끝으로 살짝 긁어보자 하얀 흔적이 남았다. 역시 초콜릿이 맞았다. 두 번째로 눈에 보인 흔적은 그로부터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가로수에서 벗어난 위치-에 남은, 마치 초콜릿이 튄 듯한 흔적이었다. 미소 짓고 혈흔처럼 기다란 물방울 모양으로 굳은 초콜릿 조각이 새끼손가락의 한마디보다 작은 크기로 서너 개쯤 남아있었다.

아리송한 얼굴을 한 캐스트가 코트의 옷깃을 여미고 있자니 키슈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가볍게 손목 스냅을 주면 담뱃갑에서 하얀 막대 같은 것이 툭 하고 튀어나온다. 키슈는 그 끝을 물어 빼고는, 불은 붙이지 않았다. 잠시 문 채로 까딱이더니 도로 입에서 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캐스트는 키슈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 집중했을 때 나오는 습관. 금방 내려두긴 했지만 키슈는 분명 무언가를.



“여름이라면 딱히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건 이상하지. 그렇지, 캐스?”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키슈가 말했다. 솔직히 조금 이상하긴 해도 진지하게 원인을 생각할 만큼 호기심이 들진 않았다. 누가 초콜릿을 떨어트렸나, 어쩌다 보니 녹았나. 아니면 그냥 녹은 초콜릿을 떨어트렸나... 누군가 곤경에 처한 일이라면 몰라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중 하나에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은 애초에 몇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심할 이유도 없었다. 일단 자신의 연인은 탐정이니까-캐스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이라면 그냥 초콜릿을 떨어트리기만 해도 햇빛에 그냥 녹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2월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녹을 리는 없단 뜻이지?”

“바로 그거야.”



길의 왼쪽에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로수의 바로 정면엔 벽에 어깨너머로 달린 카페가 있었다. 내부는 한 테이블 당 한 커플씩, 마치 오늘이 기념일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꽉 들어차 있었다. 그 주변으로도 베이커리, 식료품점, 커피 전문점 따위의 가게가 어깨너머로 별로 없었다. 화사한 화단으로 꾸며둔 베이커리의 겉모습은 아기자기하니 귀여웠지만 휑한 내부는 주인이 조금 불쌍해질 정도였다. 너무 대비가 심한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있던 카페에도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애초에 평일의 오후니 직장인들은 나와 있을 리 없고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나 돌아다닐 시간대였다. 그런데 저 카페는 유명하기라도 한 걸까, 저렇게 손님이 꽉 차있다니. 캐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추를 끝까지 채운 셔츠의 카라를 살짝 당겨 올렸다.

길의 오른쪽에는 도로다. 고대 그리스의 마차길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불규칙한 격자무늬의 작은 돌이 깔린 도로였다. 특별한 것은 없었고, 도로를 건너면 있는 것은 큰 성당의 뒤편 벽이었다. 그 벽 아래를 지나가는 등이 굽은 노인이 있었다. 작은 손수레에 폐지와 쓰레기 따위를 싣고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 안에는 비에 젖은 듯한 폐지가 올려져 있고, 수레의 가장자리에는 파란 비닐 같은 것이 말려 붙어있었다. 비닐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슬쩍 둘러본 뒤 캐스트는 입을 열었다.



“녹은 초콜릿이라면, 누군가 초코퐁듀 같은 걸 사가다가 흘린 거 아닐까.”

“나도 흔적을 얼핏 봤을 땐 그렇게 생각했어. 저기 한 발자국 정도 옆에 남은 흔적도 무언가 떨어트린 듯한 모습이니까, 포장한 초코퐁듀의 뚜껑이 날아가서 저런 흔적이 먼저 남고 열린 구멍으로 흘린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 흔적의 모양이 문제야. 가운데가 불룩하잖아.”

“마치 덩어리로 된 초콜릿이 열을 받아서 녹은 것처럼 말이지.”

“그래. 하지만 초코퐁듀는 주로 우유나 생크림을 함께 섞어 녹이니까 한 번 흘린 것뿐이라면 좀 더 넓게 퍼진 액체처럼 굳었을 테지...”



캐스트는 머릿속으로 한 장면을 재생했다. 초코퐁듀가 든 용기를 들고 가는 누군가. 그것에 신경 쓰느라 가로수를 잘 보지 못하고 툭, 부딪히고 만다. 그 결과 뚜껑이 날아가 작은 초콜릿 흔적을 만들고 당황한 그 누군가는 비틀거린다. 결국, 열린 입구에서 초콜릿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고 만다. 캐스트는 고개를 설레 내저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가설은 폐기해야겠네. 저런 가운데가 불룩한 물웅덩이 같은 모습은 절대 나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한 가지 더 생각해봤는데.”

“어떤?”

“종유석 알지? 석순도. 석회동굴에서 주로 만들어지는 지형 말이야.”

“물론.”

“그렇다면 이건 어때? 초코퐁듀 용기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거야. 그리고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으면 녹은 초콜릿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순차적으로 굳지. 그러다 보면 이렇게 가운데가 불룩한 물웅덩이 모양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종유석에 떨어진 석회수로 형성되는 석순처럼.”

“확실히 그런 거라면 저런 모습이 나타날 순 있겠지만 그럼 저 작은 흔적은?”

“용기에 그런 이상이 생겼다면 역시 충격이 가해져야 해. 아까의 가설처럼 뚜껑이 날아갔다던가 하는 일이 발생했을 수 있지. 하지만.”



그 시점에 키슈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들어 보였다. 캐스트는 그런 그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초코퐁듀를 든 그 사람은 왜 한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 거야.”

“일상 미스터리인가...”

“일상 미스터리지.”



일상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책은 종종 본 적이 있었다. 특히 키슈는 탐정인데다가 머글 세계의 책을 번역하는 것을 즐기니까 그런 내용의 책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보통 일상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상황들은, 정보가 부족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이야. 내막을 알게 되면 뭐야, 그런 거였어? 하고 시시해지는 것들이 대다수지만~”



말끝을 살짝 늘이며 키슈는 가로수 옆을 한 바퀴 돌기라도 하듯 몸을 움직였다.



“가끔은 논리적으로 진상을 도출할 수도 있는 법이지. 물론, 검증은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지만 적어도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단 말이야.”

“그래서 지금 그걸 해보겠다?”

“응, 2월에 녹은 초콜릿이라니 제법 흥미롭잖아.”



2월에 녹은 초콜릿이라. 그렇게 이름 붙이니 제법 그럴싸해졌다. 무심하고 단정한 눈을 몇 번인가 깜빡이던 캐스트는 가로수를 등받이 삼아 살짝 기대며 녹았다가 굳어버린 초콜릿을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발렌타인 데이에 말이지.”

“어차피 시간은 넉넉하니.”



키슈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곤 말을 이었다.



“시작할까. 일단 가능성을 나누는 것부터 말이야.”



으레 탐정이라고 하면 정말 ‘마법’처럼 한순간에 진상을 알아내는 것을 떠올린다. 키슈의 추리도 종종 마법 같다. 단순히 진상을 알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사건의 방향을 단숨에 바꿔내는 능력. 그저 머리가 좋고 논리적이기만 하다고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혜의 영역. 키슈는 그런 탐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단순히 답을 도출하는 과정은 지극히 무기질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주관은 개입되지 않는 연산, 직관. 키슈는 그런 것을 이 ‘일상 미스터리’에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녹은 초콜릿의 출처에 대한 문제야. 그리고 그 출처에 따라서 경우의 수는 다시 나뉘지.”

“녹은 초콜릿의 출처라면 아까 말했던 건가. 초코퐁듀, 혹은 그냥 고체 초콜릿.”

“그래. 첫 번째는 역시 초코퐁듀라고 생각할까. 그럼 아까 말했듯 초코퐁듀를 든 누군가가 가만히 서 있어야 해. 혹은 초코퐁듀 그릇이 이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 경우나.”



그런 경우가 있나. 캐스트는 무감한 얼굴을 갸웃했다.



“예를 들면 이벤트라는 게 있지. 마침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잖아? 이 기념일을 맞아 저 카페에서라던가 어떤 단체 등이 외부에서 초코퐁듀 시식 이벤트 따위를 했다면 이런 흔적은 아주 손쉽게 생길 수 있어. 왜 한 자리에 멈춰있어야 했느냐는 문제도 간단히 해결되고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그래. 비가 내렸지.”



장갑을 낀 키슈의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바닥을 가리켰다. 예의 초콜릿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의 돌 바닥은.



“가로수 아래라서 비가 덜 오긴 해도, 안되지, 안돼. 바닥이 젖어있잖아.”

“확실히... 만일 이벤트를 위해 천막을 치거나 초코퐁듀를 둔 탁자를 뒀다면 바닥이 비에 젖어 있으면 안 되니까.”

“즉, 가만히 서 있던 무언가는 면적이 좁고 머무른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지 않을 것, 이라는 조건이 붙게 되는 거야.”

“하지만 사람이 생뚱맞게 초코퐁듀를 들고 있을 이유가 있어?”

“어쩌면 서 있어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예를 들어 어딘가로 운반하거나 누군가에게 전달할 목적이었다던가. 역시 발렌타인 데이니까, 무언가 이벤트를 준비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다고 빗속에 사람을 세워두는 건 좀, 못할 짓 아닌가. 캐스트는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다가 습관적으로 안경테를 두드렸다.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러면 의문이 하나 생겨. 왜 꼭 가로수 아래여야 했을까, 라는 의문 말이야.”



키슈가 이어서 꺼낸 말은 캐스트에게 조금 의외였다. 가로수라는 것이 중요한가?



“음, 비가 덜 오니까?”

“그렇다는 말은 초코퐁듀를 들고 있는 그 사람은 ‘비를 피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말이 돼. 그렇지?”

“그렇...지?”

“그 이유는?”

“...우산이 없어서?”

“빙고.”



키슈의 눈이 빙긋 접혀 웃었다.



“하지만 우산이 없었다는 게 이유라면 모순적이야. 초코 퐁듀를 들고 비가 오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대체 뭐가 있었다는 걸까? 이벤트를 위한 거였다면 더더욱 비를 맞지 않게 소중히 해야 할 텐데. 만약 초코퐁듀 그릇의 크기가 커서 양손으로 들어야 했다 해도 어깨에 우산을 기대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럼 가로수여야만 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닐까? 그릇이 무거워서 기대서 기다린다거나. 그러면 초콜릿을 흘린 흔적도 더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무거운 그릇이었다면 역시 양손으로 들었겠지. 양손으로 퐁듀 그릇을 들고 우산은 어깨에 기댄 채 가로수에 몸을 기댄다? 상당히 불편할 것 같은데.”



캐스트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무거운 그릇을 들고 우산을 어깨에 기댄 자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렇다고 가로수에 몸을 기댄다? 젖어있는 가로수에 옷이 더러워질 것이 뻔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럴 거라면 차라리, 저쪽에 있는 벤치나 쓰레기통 커버 위에 초코퐁듀 그릇을 올려두고 우산을 씌우고 있는 게 훨씬 편하겠어.”



가로수에서 몇 발짝 더 떨어진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캐스트가 말했다. 키슈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것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따라서 초코퐁듀 가설은 폐기.”

“다음은 고체 초콜릿인가.”

“응. 그리고 난 그쪽 가설에서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를 발견해냈어. 그거 알아, 캐스? 추리라는 건 말이지 사건에 등장한 모든 요소를 포함해 증명하지 않으면 완벽하다고 불릴 수 없는 거.”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게 가능해?”

“불가능할 것도 없어. 자, 만약 고체 초콜릿이라면 그 초콜릿은 언제 녹았을까?”



아하, 그런 이야기인가. 캐스트의 눈썹이 움찔했다.



“...의도적으로 녹인 초콜릿인가, 아닌가의 이야기인 거지?”

“바로 그거야. 자, 만약 초콜릿이 바닥에 떨어진 후에 녹았다고 한다면, 누군가 열을 가해 녹였고 가기 전에 초콜릿을 밟거나 해서 튀는 바람에 작은 흔적까지 생겼다고 해볼 수도 있어.”

“이미 떨어진 초콜릿을 녹일 이유는?”

“이유는 둘째치고 방법도 의문스럽지. 토치 따위를 가져오나? 이 비 오는 날에 그게 쉽기는 할까? 그 정도의 수고를 들일 이유가 일상적인 소재로는 생각나지 않아.”

“응. ...그렇다면 의도치 않게 녹아버린 초콜릿을 떨어트렸다는 쪽인가.”

“그래. 그리고 초콜릿이 의도치 않게 녹을 일이라면, 생각보다 흔해. 사람이 깔고 앉기만 해도 포장이 잘 되어있지 않으면 녹아버리니까. 혹은 난로 가까이에 두기만 해도 녹고 말이지. 초콜릿은 인간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서 녹거든.”



고급 초콜릿일수록 입에 넣었을 때 적절히 녹아내린다는 이야기를 캐스트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누군가 초콜릿을 샀고 실수로 난로 옆에 두거나 해서 녹아버렸다, 녹은 줄도 모르고 들고 다니다가 이 부근에서 가만히 서 있던 중에 초콜릿이 흘렀다-그런 이야기야? 캐스트가 그렇게 말하며 쳐다보자, 키슈는 고개를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만약 안에 든 초콜릿이 녹은 상자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실수로 떨어트리면 저런 작은 튄 흔적이 남겠지. 그 뒤 그 상자를 들고 가만히 서 있으면 떨어질 때 충격으로 생긴 틈을 통해 녹은 초콜릿이 흘러나올 거야. 여기서 아까와 같은 의문점을 꺼내 볼까. 왜 하필이면 이 가로수 밑에, 초콜릿 상자를 들고 가만히 서 있어야 했었을까.”



비를 피하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이유는 그리 논리적이지 않음이 앞선 가능성에서 대부분 검증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 가로수 말이야,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가려질 크기지?”



키슈는 가로수에 바짝 다가섰다. 확실히 그랬다.



“여기서 고개를 살짝 내밀면 저쪽 카페가 보이고 말이야. 혹시 위화감 못 느꼈어? 이 거리를 보면서.”

“저 카페에만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정도?”

“그거야. 왜 저 카페에만 사람이 많을까. 오늘은 평일 오후.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나 나와 있을 시간이지. 그런 시간에, 바로 발렌타인에. 사람 없는 거리에서 전부 연인으로 가득 들어찬 카페가 있다면, 혹시 저긴 무언가 이벤트를 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위화감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 연인들을 위한 할인 이벤트라도 연다면 시간 여유가 있는 학생 연인들은 전부 저 카페로 몰려가리라.



“그리고 그런 카페를 초콜릿이 든 사람이 몰래 지켜볼 이유라면 금방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럼...”

“고백을 위해 초콜릿을 사가던 누군가가 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카페 안에 앉아있는 고백 상대를 봐버린 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가로수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보고 충격을 받았겠지. 그렇다면 초콜릿 상자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도 말이 돼. 초코퐁듀와는 경우가 달라. 초코퐁듀를 들고 고백할 예정이었다면 미리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경우의 수에서 초콜릿을 사가던 누군가는 고백 상대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거야.”



정말 그대로라면 상당히 슬픈 일이다. 캐스트가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려는 찰나, 키슈는 가로수에 바짝 붙였던 몸을 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진상은 이게 다가 아니지. 왜 초콜릿은 녹았는가. 아까 말했지, 캐스. 완벽한 추리는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초콜릿은... 그냥 깔고 앉거나 난로 가까이에 둬서 쉽게 녹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고백 대상에게 줄 초콜릿을 그렇게 험하게 굴렸을까? 녹을 만큼 오래 깔고 앉았을 리는 만무하고... 남는 가능성은 난로 가까이에 뒀을 가능성 정도야. 그리고 여기서 난 빗방울을 떠올렸어.”

“빗방울이라.”

“너, 아까 우리가 있던 카페에서 나올 때 천막 아래에 있던 난로 봤어?”



캐스트는 어렵지 않게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기묘한 자국이라는 생각은 했다. 빗방울이 균일하게 묻지 않고 마치 무언가 있었다는 것처럼 빈 공간이...



“...아.”

“역시 봤구나. 그 난로 위에는 두 개의 자국이 있었어. 네모난 것을 대충 올려둔 듯한 흔적이 말이야. 그거, 혹시 그 남학생의 것은 아니었을까? 초콜릿과 종이 가방을 들고 나간 남자 말이야.”

“시간상으로도 제법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왜 난로 위에 올려둬야 했을까... 운동화 끈이라도 묶어야 했나.”

“그런 거라면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놨어도 돼. 그보다는 좀 더 다급한 용건이었겠지. 그걸 생각하다 보니 카페 앞에 있던 젖은 종이 박스. 그 요소도 이 추리에 완벽히 포함 시킬 수 있게 됐어.”

“그것까지?”

“응. 아까 저 맞은편 길을 걸어가던 노인분은 봤어?”



봤다는 듯 캐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신이 보았던 노인의 모습을 묘사했다. 젖어있던 손수레 속 폐지들, 물이 떨어지는 파란 비닐, 우산 따위를.



“뭔가 이상한 거 없어?”

“폐지 주우느라 고생하시는 분한테 딱히 이상한 점이랄게...”

“왜 폐지가 젖어있을까, 그 이유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난. 파란 비닐이 있었잖아. 비가 올 땐 분명 그 비닐로 수레를 덮어서 폐지가 젖지 않게 했을 거야. 비에 젖으면 너무 무거워져서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지는 젖어있었지. 혹시 손수레가 한 번 넘어졌던 건 아닐까? 그래서 폐지가 쏟아져서 아까의 비에 젖어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넘어졌다는 곳이 혹시 아까 그 카페의 앞은 아닐까? 그런 생각 말이야.”



분명, 남자가 카페를 나선 직후 무언가 넘어지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소음이 살짝 들려왔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눈앞에서 손수레가 쏟아진 사람을 보면 다급하게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두고 상대를 도우려 했을 거야. 음,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 시점에 우산을 펴며 장난스레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까 캐스트가 가리켰던 쓰레기통 쪽이었다. 캐스트도 그를 따라 한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 없이 급하게 초콜릿과 종이 가방을 난로 위에 올려두고 쏟아진 폐지 줍기를 도운 뒤, 녹아버린 초콜릿을 가지고 우리가 왔던 그 길을 걷는 거야. 그러던 중 고백 상대가 그의 연인과 함께 있는 걸 얼핏 보고 놀라 초콜릿 상자를 떨어트려. 그렇게 작은 흔적이 생겼고 남자는 급하게 떨어트린 걸 주워든 뒤 가로수 뒤에 숨어 지켜봤겠지. 녹은 초콜릿은 천천히 떨어져 이런 기묘한 흔적을 만들고, 결국엔...”



쓰레기통의 뚜껑을 연 키슈는 주먹 쥔 손을 뻗었다. 손을 펴자 아까 입에 물어 구깃해진 담배 한 개비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낙하 방향의 끝에는, 캐스트의 눈에 익은 것이 있었다.



“...버렸겠지. 그 마음을.”



쓰레기통 안에는 녹은 초콜릿이 묻은 초콜릿 상자와 종이 가방이 구깃하게 쑤셔 넣어져 있었다. 키슈는 마치 이것을 예상했다는 듯 당연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시나리오를-그러니까 진상을 알아차리고 대화를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앳된 남학생의 첫 실연을 엿본 느낌이라 캐스트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비가 그친 후의 바닥에 남은 2월에 녹고, 다시 굳어버린 초콜릿이라.

그때 톡, 하고 딱딱한 무언가가 캐스트의 뺨을 두드렸다. 뭐야, 라고 말하기도 전에 캐스트의 시야에는 깔끔한 포장지로 싸인 작은 상자가 들어왔다. 그것은 쓰레기통 안에 버려진 초콜릿 상자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아까 그 카페에서 산 것이 분명했다.

어느 틈에, 설마 먼저 카운터로 다가갔던 그 찰나에?



“그 친구에게도 언젠가는 제 연인에게 이렇게 초콜릿을 전해줄 날이 올 테니까, 너무 상심 말라고. 누가 보면 네가 고백에 실패한 줄 알겠어.”

“...이미 다 알아내고는 이런 장난을 치고 말이야.”

“재밌잖아.”



약간 멍한 표정을 하는 캐스트를 향해 키득이며 키슈는 그의 손에 상자를 가볍게 들려주었다. 이내 캐스트는 하아, 하고 마치 한숨을 쉬듯 옅게 웃음을 내뱉더니 상자를 열었다. 부드러운 파베 초콜릿이었다. 먹어보라는 듯 서 있는 키슈를 향해 캐스트는 초콜릿 하나를 그의 입에 쏙 넣어버렸다. 어라, 뭐야. 그런 말을 하면서도 키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저것 또한 2월에 녹은 초콜릿. 하지만 다시 굳지 않겠지. 캐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입에도 초콜릿을 한 조각 넣었다. 초콜릿이 기분 좋게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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